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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그림책

노를 든 신부

 

그림책과 길을 가다 97회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이 소년이 들고 나갔는데 왜 내가 책을 고를 때 그 자리에 있었을까

 

식사하기 전에 이렇게 책을 진열했다. 3시간 반을 스트레이트로 걷고 밥을 먹으니 꿀맛이었다. 그 때 흘깃보면서 저 책이야..찜하는 맛도 괜찮다. 시작할 때 비가 올 것 같아서 미리 아침 일찍 한티성지에 책짐을 다 부려놓은 상태였다.

이 날은 한티가는길에서 그림책하다를 5구간에서 진행했다. 나로서는 올해 마지막 프로그램이었다.

2021년 10월 16일

 

분명히 이렇게 있었단 말이지.

 

밥먹자마자 한 권씩 들고 나갔을 때, 노를 든 신부는 없었다. 다들 나가고 난 후, 그제서야 책을 고르러 간 내 앞에 이 책이 다시 다소곳이 놓여 있어서 들고 나왔을 뿐이다.

 

 

 

그렇게 그림책은 신비하게 온다.

 

노를 든 신부

오소리

 

좋다좋다 하길래 사서 한 번 휙 읽고 넣어둔 책이었다. 왜일까? 시각적인 장치는 근사하다. 여성의 자립과 자존감 성취를 배젓는 노를 하나 들고 세상으로 나가는 여성으로 표현했다. 두려움에서 당당함으로 이동하는 여성을 볼 수 있다. 거친 붓터치도 시원하고 좋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시큰둥한 그림책을 길 위에서 읽을 책으로 고르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랑의 길에서 읽자고 골라든 이 그림책은 무엇을 얘기해줄 것인가.

 

 

무엇보다도 걷고 있는 모습이었다. 신부복을 입고

노를 들고 걷는다. 거추장스럽지만 입어야 하고, 저을 배가 없어 용도를 잃은 노를 버릴 수도 없다. 신부복과 노는 부모님이 내게 선물해주신 것이다. 신부복으로 드러나는 여성이라는 성별과 노가 대표하는 기질 혹은 능력은 타고난 것이다. 그런데 신부복을 입었기에 껴맞추어야 하는 틀이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따라야하는 관습적인 틀이다. 거부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거부하면서 세상에 홀로 던져졌을 때 그 때부터 노를 적절하게 사용해야한다.

 

 

무엇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처없이 헤매는 시간도 필요하다. 드디어 장착무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그것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용도로 사용하려는 융통성과 씩씩함을 불러올려야 한다.

 

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서 있을 때의 기분을 이해한다. 두렵긴 해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간다. 신부복은 다가올 운명과 도전의식으로 과하게 부풀어졌어도 사랑으로 가득 찼다. 으쓱한 과잉의식이라기 보다는 빛나는 갑옷이다.

 

 

인생 영화인 반지의 제왕에서 에오윈이 전쟁을 시작하기 전 모습과 닮았다. 삶은 학교밖 시험이기도 하면서 전쟁터와 같다. 그 시기를 넘으면서 비장하고 치열할 수 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에오윈이 한 말을 나누고 싶다.

I am no man.

 

 

 

 

 

 

 

 

 

 

 

 

 

 

 

 

 

신부복을 입고 노를 들고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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